내가 신입사원 때의 일이다. 청춘의 부푼 꿈을 안고 회사에 입사하여 여러가지 입문교육을 받고 기본 소양을 익힌 후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배치받은 부서로 처음 출근하던 기분은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부서의 여러 선배들은 각자 좋은 이야기 및 경험담을 해 주는 등 필요이상의 친절을 베풀었고 급기야 나는 선배들의 말에 현혹되어 내가 가장 뛰어난 신입사원이며 앞으로 회사를 이끌 사람은 나 밖에 없다는 착각에 빠지게 되어 모든 일을 필요이상의 의욕을 가지고 하게 되었다.
그러나 필요이상의 강한 의욕에 비해 실제로 신입사원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너무나 한정되어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대부분의 일이라는 것은 바로 선배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이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복사, 서류 정리 등 잔심부름이다. 슈퍼에너제틱한 엘리트 신입사원이라는 쓰잘 데 없는 자존심이 나의 복사 및 잔심부름에 대한 의욕을 조금 약하게 하였으나 당시의 나에게는 자존심보다 군기가 더 들어있어서 복사의 달인으로 불릴 만큼 아무런 불평 불만 없이 복사에 전념하곤 했다.
몇 달간의 고달픈 복사 생활을 겪고 부서에 조금 적응할 즈음에 선배들이 싫어해서 내가 맡아야 했던 또 다른 일은 바로 각종 보고서 작성이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선배들은 갖은 칭찬을 해 가며 나에게 격무를 맡기기 시작했고 내가 생각하기에도 전혀 문서 같지 않아 보이는 아주 허접한 보고서를 작성해서 결재를 맡아도 처음에는 나를 지속적으로 부려먹을 양으로 잘했다는 칭찬으로 일관하는 선배들로 인하여 보고서 작성에 대한 나의 스트레스는 커져만 갔다.
그나마 복사는 머리가 아프지 않고 몸이 조금 힘들고 귀찮을 뿐이었지만 보고서는 차원이 달랐다. 이론상 보고서 작성을 하고 있으면 남들이 다 퇴근하기 전에는 퇴근이 불가능하다. 마치 일이 남아 있는데도 그냥 퇴근을 해 버리는 무책임한 사원으로 찍힐까 봐 남들이 다 퇴근하고 나서야 퇴근을 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 경우에도 생존의 법칙은 있다. 다 같이 회식을 하게 되는 날에는 일찍 퇴근이 가능하고, 거래처에 외근을 갔다가 퇴근시간이 지난 경우에는 간단히 전화로 보고하고 퇴근할 수 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거래처에 갈 때는 항상
지나고 나면 당사의 이런 기억들이 다 추억이고 재미있게 생각되지만 그 때는 너무 힘이 들어서 주어진 보고서 작성을 하지 않을 방법을 찾아 헤메곤 했던 것 같다. 퇴근하고 나면 밤에 회사에 불이 나서 서류가 다 없어질 것이라는 상상을 하기도 하고, 갑자기 다른 부서로 발령을 받게 되어 업무를 인수인계하는 꿈을 꾸기도 했다.
내가 지금 신입사원들을 보면 모르긴 몰라도 욘석들도 동일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당연히 신입사원들에게서도 당시 내가 느끼고 있었던 회사에 대한 책임감, 그리고 혼자 회사일 다 할 것 같은 자만감 이런 모습들이 느껴진다. 정말 귀엽기도 하고 든든하기도 하다. 이 녀석들 중 하나가 저녁때 술 한잔 사달라고 한다. 일이 힘든 것 같아 보이지만 녀석의 표정은 밝기만 하다. 흔쾌히 술 먹으러 가자고 했다. 내 선배들이 나에게 그랬던 것 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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